기사계첩 (국보 제33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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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기사계첩 (국보 제334호)은 1719년 숙종이 기로소에 입소한 것을 기념하여 제작된 화첩으로, 현재 박물관과 개인 소장으로 5건 정도가 전해진다. 이 화첩은 임방의 서문, 숙종의 어제, 김유의 발문, 행사 참여자 명단, 기록화, 기로신들의 명단과 초상화, 축시, 제작 실무자 명단 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당대 최고의 화원들이 초상화를 제작하여 예술적 가치를 높였다. 기로신 홍만조에게 하사되어 풍산 홍씨 종가에 전승되었으며, 3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원형이 잘 보존되어 조선 왕실 하사품의 차림새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2020년 12월 22일 국보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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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계첩은 1719년 숙종의 기로소 입소를 기념하여 제작된 계첩으로, 임방의 서문, 숙종의 어제, 김유의 발문, 기로신 명단, 행사 기록화, 기로신 초상화 및 축시, 제작 실무자 명단 등이 포함되어 있으며, 김진여, 장태흥 등 당대 최고의 화가들이 참여하여 조선 후기 궁중회화의 높은 수준을 보여주는 역사적, 예술적 가치를 지닌 국보이다. - 계회도 - 기사계첩
《기사계첩》은 조선 숙종 때 기로소 관련 행사를 기념하여 제작된 기록화첩으로, 연회 장면, 기신들의 좌목과 초상, 축시, 숭정전진하전도, 경현당석연도, 어첩봉안도 등을 담고 있으며 국보 및 보물로 지정되어 여러 기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 아산시의 문화유산 - 난중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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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계첩 (국보 제334호) - [유적/문화재]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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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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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칭 | 기사계첩 및 함 |
유형 | 국보 |
지정 번호 | 334 |
지정일 | 1978년 12월 7일 (보물), 2020년 12월 22일 (국보) |
해지 여부 | 해당 없음 |
소재지 | 충청남도 아산시 |
시대 | 조선시대 |
소유자 | 홍완구 |
참고 사항 | 해당 없음 |
면적 | 해당 없음 |
수량 | 1첩 |
전승지 | 해당 없음 |
전승자 | 해당 없음 |
지도 | 해당 없음 |
띄움 | 해당 없음 |
꼬리표 | 해당 없음 |
너비 | 해당 없음 |
대체 지도 | 해당 없음 |
설명 | 해당 없음 |
위도 (도) | 해당 없음 |
경도 (도) | 해당 없음 |
웹사이트 | 해당 없음 |
문화재청 ID | 11,03340000,34 |
2. 제작 배경 및 과정
이 계첩은 1719년(숙종 45년) 숙종이 기로소에 들어간 것을 기념하기 위해 제작되었다. 기로소는 나이가 많은 고위 문신들의 친목 모임이었다. 이 행사는 1719년에 있었지만, 초상화를 그리는 데 시간이 걸려 1720년(숙종 46년)에 완성되었다.[3]
이 계첩은 임방이 쓴 계첩 서문, 경희궁 경현당景賢堂에서 열린 사연賜宴 때 숙종이 지은 어제御製, 김유의 발문, 각 행사 참여자 명단, 행사 장면을 그린 기록화, 기로신 11명의 명단과 초상화, 축시祝詩, 계첩 제작 실무자 명단으로 구성되어 있다.[3]
계첩은 기로신들에게 나누어 줄 11건과 기로소에 보관할 1건을 포함하여 총 12건이 제작되었다. 현재까지 박물관과 개인이 소장한 5건 정도가 전해지고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본은 2019년 국보 제325호로 지정되었다.[3]
이 계첩은 기로신 중 한 명인 임방이 쓴 서문, 경희궁 경현당에서 숙종이 지은 글, 김유의 발문, 행사 참여자 명단, 행사 장면을 그린 기록화, 기로신 11명의 명단과 초상화, 축시, 계첩 제작 실무자 명단으로 구성되어 있다. 초상화는 임금의 초상을 그렸던 화원 박동보, 장득만, 허숙 등이 그렸다.[3]
이 계첩은 홍만조에게 하사되어 풍산 홍씨 종가에 전해져 내려온 것으로, '만퇴당장(晩退堂藏, 만퇴당 소장)', '전가보장(傳家寶藏, 가문에 전해 소중히 간직함)'이라는 글씨가 이를 증명한다.[3] 300년이 넘는 세월에도 불구하고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는데, 이는 내함, 호갑(싸개), 외궤로 이루어진 삼중 보호장치 덕분이다. 이는 왕실 하사품의 모습을 보여주는 희귀한 사례이며, 제작 수준도 높아 화첩의 완전성을 돋보이게 한다.[3]
이 계첩은 숙종의 기로소 입소라는 역사적 사실을 담고 있으며, 이후 고종이 기로소에 들어갈 때 모범이 되었다. 제작 시기와 제작자가 분명하고, 기로신들의 친필 글씨와 그림의 완성도가 높아 궁중회화를 대표할 만한 예술성을 갖추고 있다. 계첩과 함께 제작된 함 역시 당시 왕실 공예품 제작 기술을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이다.[3]
3. 구성 및 내용
행사 그림은 다음과 같은 순서로 수록되어 있다.[3]
김창집을 비롯한 계회참석자 10인의 초상화에서 평소 집무복인 단령의 모양이나 색채가 다르며, 조선 후기 문신인 홍만조의 축시 제목이 없는 점 등으로 다른 기사계첩과 대조하여 연구해 볼 수 있다.[3]
다른 계첩에서는 볼 수 없는 ‘만퇴당장(晩退堂藏, 만퇴당 소장)’, ‘전가보장(傳家寶藏, 가문에 전해 소중히 간직함)’이라는 글씨가 수록되어 있는데, 이는 이 계첩이 1719년 당시 행사에 참여한 기로신 중 한 명이었던 홍만조(1645~1725)에게 하사되어 풍산 홍씨 종가에 대대로 전승되어 온 경위와 내력을 알려준다.[3]
4. 예술적, 역사적 가치
이 계첩은 박동보, 장득만, 허숙 등 당대 최고의 화원들이 참여하여 예술적 완성도가 높다. 3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원형이 잘 보존되어, 조선 왕실 하사품의 차림새를 복원할 수 있는 중요한 근거를 제공한다.[3] 숙종의 기로소 입소라는 역사적 사실을 담고 있으며, 고종이 기로소에 입소할 때 모범이 되었다는 점에서 역사적 중요성이 크다. 현존하는 궁중회화를 대표할 만한 예술성을 지니고 있다.[3] 계첩과 함께 제작된 함(내함, 호갑, 외궤)은 당시 왕실 공예품 제작 기술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이며, 조선 후기 문신들의 복식, 서체 등을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를 제공한다.[3]
5. 소장 현황 및 지정
기사계첩은 현재 박물관과 개인 소장 5건 정도가 전해지고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본은 2019년 국보 제325호로 지정되었다.[3]
이 계첩은 300년이 넘는 오랜 세월에도 불구하고 훼손되지 않은 채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는데, 이는 내함, 호갑(싸개), 외궤로 이루어진 삼중 보호장치 덕분이다. 화첩을 먼저 내함에 넣고 호갑을 두른 후, 외궤에 넣는 방식은 조선 왕실에서 민가에 내려준 물품의 차림새를 복원할 수 있는 중요한 근거가 된다. 이는 왕실 하사품으로서 일괄로 갖추어진 매우 희소한 사례일 뿐만 아니라 제작 수준도 높아 화첩의 완전성을 돋보이게 한다.[3]
숙종의 기로소 입소라는 역사적 사실을 담고 있고, 후에 고종이 기로소에 입소할 때 모범이 되었다는 점, 제작 시기와 제작자가 분명하게 밝혀져 있어 학술적으로 중요하다. 또한 기로신들의 친필 글씨와 더불어 그림이 높은 완성도와 화격을 갖추고 있어 현존하는 궁중 회화를 대표할 만한 예술성을 갖추었다. 아울러 계첩과 동시기에 만들어진 함(내함, 호갑, 외궤) 역시 당시 왕실 공예품 제작 기술에 대한 귀중한 정보를 알려준다는 점을 인정받아 2020년 12월 22일 국보로 승격되었다.[3]
참조
[1]
문서
기로소란 70세 이상, 정2품 이상 직책을 가진 노년의 문관(文官)들을 우대하던 기관으로, 1719년 당시 숙종은 59세였기 때문에 기로소에 들어갈 나이가 되지 않았으나 태조 이성계가 70세 되기 전 60세에 들어간 예에 따라 입소(入所)한 것이다.
[2]
문서
계첩이란 행사에 참여한 관료들이 계를 조직해 만든 화첩으로, 보통 참석한 인원수대로 제작해 나눠 갖는 것이 풍습이었다. 오늘날 기념사진과 유사한 기능이라고 할 수 있다.
[3]
웹인용
‘기사계첩 및 함’국보 지정 ‧ 말모이 원고 등 6건은 보물 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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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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